내가 믿기로, 변혁의 씨앗은
삶이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가진
공동체(또는 작은 공동체)에 있다.
개인평점 3.5 / 5
보통 '독서'라 함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선택한 책을 개인이 읽고 스스로 학습하여 개인의 삶을 좀 더 나은 삶으로 바꾸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저자는 독서를 통해서 개인의 성장 뿐 아니라 개인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고 또 기여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저자인 C. 크리스토퍼 스미스는 '잉글우드 북리뷰'라는 서평 사이트를 운영한다. 그는 서평사이트에서 도서에 관한 서평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다니고 있는 잉글우드 교회에서 독서모임을 만들고 독서를 권유하여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저자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인 '독서'가 함께 읽을 때 지역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에 따라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체험하고 확신하여 본 책을 기록했다.
따라서 책의 내용은 저자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확신에 찬 어조로 기록되었다. 특히 개인적인 독서가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함께 이루어졌을 때 교회가 그 지역안에서 어떻게 함께 성장하는지에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빨리 빨리 하려는 사회의 가속화에 반하여 '슬로리딩'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이를 위한 공동체의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책 초반에는 문제의식과 독서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이후에는 독서의 확장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다만 읽으면서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공동선'에 대한 내용은 다소 부족해 보였다. 독서의 필요성과 방법론 그리고 현대의 독서습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설명하는데 많은 양을 사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독서를 통해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책으로서 매우 유익했다.
주요내용
책에서 우리는 지역 교회를 일종의 학습하는 조직으로 볼 것인데, 그 정체성의 핵심에는 학습과 행동이 모두 놓여 있다. 우리는 (아마도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학습 요소인) 독서의 실천을 탐구하고, 우리를 행동으로 더 깊이 이끌도록 함께 독서할 수 있는 방법을 숙고할 것이다. - < 공동선을 위한 독서, C. 크리스토퍼 스미스 지음 / 홍정환 옮김 > 중에서
우선적으로 저자는 책을 통해 독서의 방법부터 살펴보자고 한다. 개인적인 올바른 독서법이 결국 공동선을 위한 공동체의 독서에 영향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내 경험은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연구에 따르면 인터넷 때문에 독서가 중단되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읽는 것 같다. 다만 읽는 방식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더 빨리 읽는다. 블로그와 소셜 미디어에 올라오는 게시물 같은 짧은 토막글을 선호한다. 인터넷은 마우스 클릭, 몇 번의 키 입력 또는 터치스크린을 문지르는 것만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십억 가지의 선택을 제공한다. 사회 비평가 월터 컨(Walter Kirn)은 이것을 “무한한 연결의 악몽”이라고 불렀다. 2007년 <애틀랜틱>(Atlantic) 기사에서 “멀티태스킹이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있다고 했다...(중략)...포로 신세의 영향 중 하나는 심리학자들이 ‘지속적인 부분 집중’(Continuous Partial Attention, CPA)이라고 부르는 상태다. CPA는 멀티태스킹과 다르다. 멀티태스킹을 할 때, 우리는 주로 집중해야 하는 한 가지 일을 하면서 집중력이 덜 요구되는 다른 일을 한다(멀티태스킹은 음악을 듣고 간식을 먹으면서 글을 쓰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CPA에 빠진 우리는 기회를 놓칠까 봐 항상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이런 불안은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 CPA라는 용어를 만든 연구자 린다 스톤(Linda Stone)은 “우리 중 많은 사람이 CPA의 과한 자극과 성취감 부족이라는 ‘그림자 측면’(shadow side)을 느낀다”고 말했다. - < 공동선을 위한 독서, C. 크리스토퍼 스미스 지음 / 홍정환 옮김 > 중에서
흔히들 요즘은 책을 안읽어라고 말을 한다. 그렇지만 책을 읽지 않는것이 아니라 '문고판'을 읽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읽는 글자량은 이전 사람들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더 많이 본다 할 수 있다. 다만 저자는 오늘날과 같은 빨리읽기는 이해력을 떨어뜨리고 이것을 읽는동안 다른 것을 놓칠까봐 긴장하고 빠르게 보려는 경향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해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내가 믿기로, 변혁의 씨앗은 삶이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가진 공동체(또는 작은 공동체)에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대조 사회(contrast society)가 되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 곧 구별되고 대조되는 방식을 보여 주기 위해 따로 떼어진 공동체로 부름받았음을 자주 상기시킨다. 이와 유사하게, 신약 기자들은 세상과 대조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한다. - < 공동선을 위한 독서, C. 크리스토퍼 스미스 지음 / 홍정환 옮김 > 중에서
대안공동체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다. 사실상 교회는 사회에서 말하는 이익추구와 근본적으로 다른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 안에 평화가 있음을 보여주어야 할 대안공동체이다. 현대의 교회들이 이러한 대안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하는가? 아니면 별다를것없는가?
때로는 기반이 된 이론이 정당성을 상실한 후에도 구조는 오랫동안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일부 교회는 고린도전서 14장 34절과 같은 구절에 근거하여 여성들이 설교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여자들은 교회에서는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 연구에 따르면 고린도 교회와 같이 대부분의 여성이 교육을 받지 못한 1세기 교회에서 바울의 가르침은 교회 예배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여성들이 예배 중에 남편에게 계속 질문하는 것은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일반적으로 남성과 동일한 교육 기회를 갖는 오늘날의 북미에서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이끌어 낸 이론과 실천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 하지만 일부 교회는 아직도 여성의 설교를 금하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 < 공동선을 위한 독서, C. 크리스토퍼 스미스 지음 / 홍정환 옮김 > 중에서
이러한 오류를 막기 위해서 공동선을 위한 함께 읽는 독서가 필요하다.
독서는 물론 필연적으로 개인의 상상력을 확장하고 변화시키지만, 사회적 상상력을 변화시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독서를 통해 우리는 새롭고 다른 언어와 이론, 구조를 접하게 된다. 비록 다른 형태의 매체에서도 이러한 것들을 접하지만, 독서를 통해 더 깊은 방법으로 접한다. 방송 매체와 달리 독서는 우리가 콘텐츠에 참여하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게 해준다. 비디오와 달리 독서는 머릿속에서 작품을 상상하도록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대체로 재미 삼아 책을 읽을 때도 단순히 읽는 것의 수동적 소비자가 아닌 것이다. - < 공동선을 위한 독서, C. 크리스토퍼 스미스 지음 / 홍정환 옮김 > 중에서
독서는 개인적인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행위이며 독서모임은 오류를 바로잡고, 상상력을 증폭시키며 사회로까지 확장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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