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관심사는 단 하나였다.
인간의 내면에서 악은
어떻게 발화하고 탄생하는가.
그래서 ‘종의 기원’이라는
제목도 금세 떠올렸다.
다른 대안은 없었다.
-작가 정유정의 말,
The joongang과의 인터뷰 중-
줄거리
유진은 잠결에 피냄새를 맡고 잠에서 깨어난다. 그날도 매일 먹어야 했던 '약'을 며칠간 끊은 상태에서 잠이들었었다. 자기를 늘 무기력하게 만들었던 약을 먹지 않는 날이면 늘 알 수 없는 기운이 넘쳤고 그럴때마다 '개병'이라 부르는 증상이 도지기 시작했다. 유진은 개병이 도지는 날의 습관대로 지난밤 외출을 했었고, 외출후 돌아와 곧 시작될 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10년전 양자로 들어와 자신의 형이 된 해진에게서 전화가 온다. 지난 밤부터 어머니와 통화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해진은 유진에게 어머니의 안부를 물어본다. 전화를 받고 일어난 유진은 피투성이로 얼룩진 방과 피를 뒤집어쓴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끔찍하게 살해된 어머니의 시신을 보게된다.
오래전 가족여행 중 사고로 아버지와 친형을 잃은 유진은 정신과 의사인 이모로부터 처방 받은 알 수 없는 약을 매일 먹기 시작했다. 유진은 16세에 유망한 수영선수가 되기까지 꾸준히 약을 먹었다. 그런데 수영대회를 앞두고 약을 끊었다가 발작으로 인해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이후로 어머니의 철저한 감시와 규칙 그리고 자신을 자기마음대로 조정하려는 듯한 이모의 행동들에 늘 갑갑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갑갑함을 참지못한 유진은 가끔 약을 몰래 먹지 않았고 그런 날이면 밤에 몰래 하는 외출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며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외출이 살인을 위한 것임을 기억해낸 유진은, 지난밤 어머니 역시 자신이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유진을 이상하게 여긴 이모와 해진이 어머니를 찾아 유진을 방문하지만 끔찍한 결말을 맞게되고 만다. 아슬아슬하게 도망에 성공한 유진은 그로부터 1년후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개인점수: 5 / 5
언젠가 책소개하는 프로에서 정유정작가의 '종의기원'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살인자의 1인칭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해서 흥미를 느꼈던 책이다. 개인적으로 첫장면부터 충격적이었고, 책을 덮을때까지 긴장감은 계속 되었다. 사건전개나 서사가 정말 실감나게 잘 묘사했다는 생각을 했다.
주인공 유진은 사이코패스임이 분명하다. 그의 이모는 어렸을적 이 사실을 발견했고 어머니에게 약을 먹이면서 감시해야 한다고 말을 했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인정하게 된다. 책을 보면서 유진이 사이코패스가 된 것은 언제일까? 생각을 많이 했다. 정말 태어나면서부터 사이코패스였을까? 아니면 주변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어떤 심리프로그램에서 대기업 CEO들 가운데 사이코패스검사를 하면 사이코패스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일반사람들에게도 사이코패스의 기질은 가지고 태어날 수 있다는 소리이다. 결국 그것을 발현시키느냐 안시키느냐는 자기자신의 선택도 있겠지만 주변환경의 영향도 어느정도 작용한다고 한다. 자신을 늘 병자취급하며 조정하려는 이모의 시선과 엄격한 규칙으로 그를 통제하는 어머니 그리고 양자로 들어와 어머니의 사랑을 나누어야 했던 해진.
이렇게 말하면 살인자 편을 드는 것 같아 이상하지만 소설이 유진의 입장에서 전개되다 보니 여러모로 생각하게 만들었던 소설이다. 작가 역시 책관련 인터뷰에서 "인간의 내면에서 악이 어떻게 발화되고 탄생하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래서 소설 제목도 '종의 기원'으로 했다고 말했다. 유진에게도 '개병'이 도지는 트리거가 있었다. 사회안전망은 좀 더 이러한 부분에 신경을 쓰고 관리해야 할 것같다. 솔직히 살인과 관련된 소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긴장감넘치게 재미있게 읽었다. 밤에 읽기는 좀.....
장면들
인간이 늘‘정답’을 선택하지 않는 건 그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의 눈금을 조금 낮추자 간단한 해결법이 보였다. 약을 먹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며칠 약을 먹지 않는다고 무슨 일이 있겠나, 싶었다.(p.135)
아이는 약의 부작용에 대해 더 이상 불평하지 않는다. 약을 거부하거나 몰래 뱉어버리는 짓도 하지 않는다...(중략)... 내게 뇌전증이 입에 거품 물고 뒤집어져서 발작하는 병이냐고 물었던 작년 12월 어느 날부터 그랬다...(중략)... 나는 아이의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차라리 오해하는 채로 지내게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중략)...아이가 탈진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혜원은 기왕에 그리된 거, 오해를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활용하라고 말했다. 아이를 제어할 핸들로 삼으라고 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투약 중단에 대한 강력한 제동 장치도 될 수 있을 거라 했다. 그게 옳은 걸까, 묻자 혜원은 그런 걸 따지기엔 너무 늦었다고 말했다. (pp. 232-233)
혜원에 따르면, 유민과 유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인지의 방식’이었다. 유민이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는 성격이라면, 유진은 모든 채널을 오롯이 자신에게만 맞춘다고 했다. 따라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도 하나뿐일 거라고 했다. 나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 그때는 기분이 상했지만 이제 와선 그저 궁금하다. 나는 유진에게 이로운 존재일까, 해로운 존재일까. (p 249)
포식자는 보통 사람과 세상을 읽는 법이 다르다고, 혜원이 말했다. 두려움도 없고, 불안 해 하지도 않고, 양심의 가책도 없고, 남과 공감하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남의 감정은 귀신처럼 읽고 이용하는 종족이라고 했다. 타고 나길 그렇게 타고 났다고 했다.(p.300)
유진과 같은 사이코패스를 최상위 포식자로 언급하고 그의 위험성을 알리는 대목이다. 저 말들을 좋은말로 뒤집어서 생각하면 성공한 사람들의 성향이 되기도 한다니....정말 종이한장 차이다.
어디선가 스치듯 봤던 문장 한 줄이 떠올랐다. 여자의 가방을 들여 다 보는 건 그녀의 영혼을 들어다 보는 것이라고 했던가. 문득 가방을 열어보고 싶은 유혹이 일었다. 내 생에 이모의 영혼이 지금처럼 궁금했던 적은 없었다. 어떤 눈을 가진 영혼이기에, 일곱 살짜리가 그린 그림을 ‘모친 살해’의 암시로 읽을 수 있었는지, 어떤 입을 가진 영혼이기게 열 살짜리 조카에게 포식자라는 선고를 내릴 수 있었는지, 어떤 낯짝을 가진 영혼이기에 한 인간의 삶을 ‘치료’라는 명분으로 조져놓을수있었는지 어떤 심장을 가진 영혼이기에 ‘포식자’의 홈그라운드로 혈혈단신 쳐들어 올 수있는지(...) 뜨뜻한 핏물을 얼굴에 뒤집어쓴 채, 그녀의 마지막 말을 생각했다.(pp.260~288)
어머니가 틀렸다. 자명하다고 모두 사실은 아니다. 본인이 고백한 대로 어머니는 사건 당시, 현장에 있지 않았다. 사건의 전말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명확하게 봤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명확하게 잘못 본 경우였다. 어쩌면 믿고 싶은 대로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야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술에 취해 잠이 들었고, 모든 비극이 그로부터 출발했다는 원죄의 무게를 덜 수 있을 테니까. 나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비열한 행동이고, 그 결과로 목숨을 잃었다는 점에서 어리석은 판단이고, 내 인생까지 파멸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용서 할 수 없는 죄였다. 어머니가 내 해명을 믿었더라면, 아니 한 번 더 해명할 기회만 줬더라도 ‘사건’은 ‘사고’로 수정될 수 있었을 것을. 어머니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깊은 상처를 받았던 열 살짜리 소년이 ‘사람에게서 격리돼야 할 포식자’로 선고받는 일도 없었을 것을.(p.311)
도덕적이고 고결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는 금지된 행위에 대한 환상, 잔인한 욕망과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환상이 숨어 있다. 사악한 인간과 보통 인간의 차이는 음침한 욕망을 행동에 옮기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p.38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