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아버지가 있지만 누구나 아버지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해서 다 안다고 할 수 없다.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그런 점에서 공감이 가는 소설이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동안 주인공은 아버지의 진가를 재발견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1.줄거리
아리는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해방이후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빨치산 활동을 했지만 처절하게 패배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사회주의자로서 작은 마을에서 그 사상을 실천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런 아리의 가정은 늘 가난한 삶을 살았다. 뿐만 아니라 가족이 빨치산이었다는 사실은 아버지와 관계된 많은 이들에게 불이익을 주게되었고 아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는 성장하면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이 본 아버지의 모습은 생활능력 없는 전직 빨치산이라는게 전부였다.
그러던 아버지가 노동절 새벽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만우절은 아니었다. 만우절이라 한들 그런 장난이나 유머가 오가는 집안도 아니었다. 유머라니. 유머는 우리 집안에서 일종의 금기였다. 그렇다고 유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가 봐도 유머일 수밖에 없고 유머여야 하는 순간에도 내 부모는 혁명을 목전에 둔 혁명가처럼 진지했고, 그게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p.7)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3일동안 아리는 마을 사람들과 지인들로부터 그들과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듣게 된다.
그럴 때마다 아리는 그때 당시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곱씹어본다. 그러면서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박선생의 봉투를 보고 나서야 내가 평소와 달리 이십만 보낸것이 기억났다. 깊이 생각할것도 없었다. 낯 뜨겁게도 남에게 맡기는 돈이라서였을 것이다. 조금씩 자주 보내는 게 안전하다고, 영악한 나는 생각했을 것이다 십 칠만 오백원. 봉투에 적힌 박선생의 반듯한 글씨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고 봐라, 가시내야. 믿고 살 만허제? 영정 속 아버지도나를 비웃는 듯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인간을 신뢰했다. 보증을 서줬더니 말도 없이 야반 도주 해버린 먼 친척도 아버지는 원망하지 않았다.(p.57)
그렇게 지내는 3일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원했던 평등한 사회를 자신의 자리에서 실천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성장하면서 아리는 그런 아버지를 오해했을 뿐이고 어린 생각으로 아버지를 판단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례를 치루는 동안 아리는 아버지가 전부 옳았음을 깨닫게 된다.
또 그놈의 오죽하면 타령이 었다.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느냐,는 아버지의 십팔번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오죽해서 아버지를 찾는 마음을 믿지 않았다 사람은 힘들 때 가장믿거나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힘들 때 도움 받은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그렇다 한들 상처 받지 않았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 탓이고,그래서 더더욱 혁명 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p.102)
아버지에 대해서 새롭게 알고 깨달았지만 이미 아버지가 곁에 없어진 시간. 아리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아버지를 몰랐던 자신에 대해 한탄한다.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펀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 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하자고 졸랐다는 아버지의 젊은 어느 날 밤이 더 이상 웃기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 내 아버지였다. 누구나의 아버지가 그러할 터이듯.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p.249)
2.개인평점 : 4 / 5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한 글귀가 생각났다. 어렸을 적에는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10대때가 되면 아버지의 말이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20대가 되면 아버지의 말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30대가 되면 아버지말이 맞는 것도 있다고 생각하고, 40대가 되면 아버지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50대가 되어서 아버지의 조언을 듣고싶다고 생각했을 때 아버지는 내 곁에 없다.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읽는 내내 그리움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그래서인지 한쪽 가슴이 계속 아렸다. 특히 아리가 사춘기 때 틀어진 관계를 해소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공감이 많이 되었다.
베인 것은 글자만이 아니었다. 뭐랄까, 아버지와 나를 잇고 있던, 세월 지날수록 얇아진 어떤 인연, 혹은 마음의 끈이 싹둑 잘려나간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버지는 낫을 휘둘러서는 아니 되었다. 밥값을 하라고 해서도 아니 되었다. 아버지가 해야 했던 것은 빨치산의 딸로 살게 해서 미안하다는 진정한 사과였다.(p.205)
아리는 아버지가 빨치산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불편을 아버지에게 쏟아내었고, 이후로 아버지와의 관계가 서먹해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는 누구나 사춘기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나의 불편이 모두 부모로부터 기인한다고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자식이나 부모는 서로를 선택해서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다.
부모들도 자신의 삶이 있었고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자식들은 자신들의 불편함 때문에 부모도 사람이라는 것을 부모도 꿈이 있었다는 것을 부모도 바램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학수는 노련한 사람이다 아버지처럼 컵에 술을 따라 들이켜는 학수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학수는 지금 옛 추억을 상기하는 척, 저 혼자 잘난 나에게 엿을 먹이고 있는 것이다. 너는 대체 어떤 딸이었냐고.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누구의 딸 인지가 중요했을 뿐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 데 나는 평생을 바쳤다.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말에는 ‘빨치산’ 이 부모라는 전제가 존재한다. 그 부모에게도 마땅히 , 자식이 부모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듯 자식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을 만큼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가 무거웠다고, 나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변명을 들을 아버지는 이미 갔고 나에게는 변명의 기회조차 사라졌다. 그 사실이 뼈 아파 나는 처음으로 소리 내 울었다.(pp.224-225)
상황과 모습이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대부분의 자녀들이 부모를 전부이해하지 못한다. 자신들이 본 모습이 전부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부모의 모습이 있다. 그것을 알려고 하지는 않을 지라도 적어도 부모님의 삶을 무시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지나간 시간이 계속해서 떠올랐으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를 보내게 된 책이었다.
3.작가소개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집필한 정지아 작가는 1965년 구례에서 출생했고, 이후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마친뒤 1990년 '빨치산의 딸'을 시작으로 작가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으로는 '행복',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등이 있으며, 김유적 문학상, 심훈문학대상, 이효석문학상 등 다수의 수상경력이 존재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리라는 딸이 갑작스레 치루게 된 아버지의 장례식을 통해 자신이 오해했던 아버지의 진면목을 다시 깨닫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은 소설집으로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사램이 오죽하면 글냐. 아버지 십팔번이었다. 그 말을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 진작 아버지 말 들을 걸 그랬다.
아버지. 아버지 딸 참 오래도 잘못 살았습니다. 그래도 뭐, 환갑 전에 알기는 했으니 쭉 모르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딸을 대장부의 몸으로 낳아주신 것도, 하의 상의 인물로 낳아주신 것도 다 이해할 터이니 그간의 오만을, 무례를, 어리석음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길.... 감사합니다, 아버지 애기도 하는 이 쉬운 말을 환갑 목전에 두고 아버지 가고 난 이제야 합니다.
어쩌겠어요?그게 아버지 딸인 걸. 이 못난 딸이 이 책을 아버지께 바칩니다.(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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