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시대의 지성이라 불렸던 이어령 교수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엮어 놓은 것이다. 평소 개인적으로도 좋은 스승이라고 생각했던 이어령교수의 마지막 가르침이라 읽고 싶었다. 독서모임에서 읽을 책으로 선정되어서 드디어 읽게 되었다.
줄거리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집필한 기자이자 작가 김지수 씨는 한 신문사에서 연재하였던 인터뷰모음집 '김지수의 인터스텔라'로 유명하다. 그가 평소에 스승이라고 여겼던 이어령 교수의 병환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가르침을 담아놓을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이어령교수와 매주 화요일 만나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인터뷰 주제는 딱히 정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그날 그날 떠오르는 주제로 대화형식으로 진행하였고 그렇게 해서 매주 모인 마지막 가르침이 모여 한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생의 길목마다 어김없이 돌부리에 걸려 머리가 하얘지는 내가 이어령이라는 스승을 만난건 축복이었다. 선생님이 암에 걸려 투병중이던 2년전 가을, 나는 당신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중략)...하루치의 대화는 우연과 필연의 황금분할로 고난, 행복, 사랑, 용서, 꿈, 돈, 종교, 죽음, 과학, 영성 등의 주제를 타고 변화무쌍하게 흘러갔다...(중략)...우수수 떨어지는 부스러기만 수습해도 남은 인생이 허기지지 않을 것 같았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이어령 > 중에서
개인평점: 5 / 5
인생에 살면서 참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복받은 인생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으며 산다. 그렇기에 참된 스승이나 좋은 멘토는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점에서 '이어령 교수의 마지막 수업'은 직접 대면한 스승은 아니지만 좋은 가르침을 주기에 충분했다.
자식과 손자를 먼저보내고 자신의 죽음을 앞둔 스승은 그렇기 때문에 삶과 죽음에 대해 더 깊은 가르침을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시대의 지성이라 일컬어졌던 이어령교수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가르침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만원버스를 생각해보게. 사람이 꽉 차서 빈 데가 하나도 없는 게 바로 영혼 없는 육체라네. 유명한 일화가 있어. 스님을 찾아온 사람이 입으로는 ‘한 수 배우고 싶다’고 하고는 한참을 제 얘기만 쏟아냈지. 듣고 있던 스님이 찻주전자를 들어 잔에 들이붓는 거야. 화들짝 놀라 ‘스님, 차가 넘칩니다’ 했더니 스님이 그랬어. ‘맞네. 자네가 비우지 못하니 찻물이 넘치지. 나보고 인생을 가르쳐달라고? 비워야 가르쳐주지. 네가 차 있어서 말이 들어가질 못해.’ 마음을 비워야 영혼이 들어갈 수 있다네.” -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이어령 > 중에서
자신을 비워야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리라. 하지만 죽음에 대해서 이어령 교수는 마음을 비우기가 쉽지 않음을 또한 말한다. 남의 죽음은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자신에게 닥친 죽음앞에 자신의 마음을 장담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삶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죽음앞에 겸손해진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어. 동물원 철창 속에 있는 호랑이였지. 지금은 아니야.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나한테 덤벼들어.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갗을 뚫고 오지. 전혀 다른 거야.’ 전두엽으로 생각하는 죽음과 척추 신경으로 감각하는 죽음은 이토록 거리가 멀다네.” -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이어령 > 중에서
또한 인생은 노력과 운의 절묘한 조화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은 화는 나겠지만 ‘난 실력이 없어’라고 생각하지 않아. 반면 달리기 선수가 백 미터 달리기를 할 때마다 꼴찌 한다면 창피함을 느끼겠지. 여기서 미묘한 이슈가 생겨. ‘모든 것이 정해진 운명’이라고 해버리면 패자는 변명거리가 생겨. ‘내가 지는 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운이 없어서’라고. 숙명론, 팔자론으로 풀어버리면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났어’로 모든 걸 덮을 수 있네. 가난해도, 실패해도 ‘팔자’ 핑계 대면 그만이거든. 그런데 인생의 마디마다 자기가 책임지지 않고 운명에 책임을 전가하는 건, 고약한 버릇이라네.
마라톤 경주를 하다 갑자기 하늘에서 돌멩이가 날아와서 넘어진 사람은 ‘운이 나빴다’는 위로를 받을 만해. 그러나 인간이 노력할 수 있는 세계에 운을 끌어들이면 안 돼. 커트라인 1점 차로 누군가는 시험에 붙고 떨어지지만, 그것도 근접한 수준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이야. 세상은 대체로 실력대로 가고 있어. 그래서 나는 금수저 흙수저 논쟁을 좋아하지 않아. ‘노력해봐야 소용없다’는 자조를 경계해야 하 -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이어령 > 중에서
책을 읽으면서 다소 느낀 것은 이어령교수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리고 삶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매우 종교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일전에 이어령교수의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 고백했던 신앙이 그의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여진다.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거든. 성경처럼 우리의 상식을 통째로 뒤집는 책은 없어.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그런데 생각해보면 기가 막힌 얘기야. 자식 키워본 사람은 알지. 성한 자식보다 학교도 안 다니고 말썽 피운 놈이 더 눈에 밟히거든. 그게 사랑이잖아. 회사에서는 무능한 놈 해고하면 돼. 그런데 어머니는 자식을 못 바꿔. 다른 애하고 바꿀 수 있어? 못 바꾸잖아. 그게 한 마리 양을 버리지 못하는 예수님 얘기야. 숫자로 따질 수 없다는 거지.” -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이어령 > 중에서
하지만 종교에 빗대어 말하는 그의 가르침이 종교적으로 편향된 것은 아니었다. 듣고 보면 우리의 삶에서 종교를 떠나 한 스승의 가르침이요 지혜임을 알 수 있다.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글을 썼던 이어령 교수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내 아내가 ‘내 남편은 일밖에 모른다. 병원에서 수술하고도 교정 보고 글 쓰고, 아버지 제삿날에도 돌아와 일을 한다’고 하지. 그래서 내가 그랬지.
‘여보, 죽기 전까지 바느질하는 샤넬보고 주위에서 ‘좀 쉬세요’ 걱정했더니 샤넬이 뭐라고 했는 줄 알아?’
‘너희들은 이게 일로 보이니? 나는 이게 노는 거고 쉬는 거야.’
기가 막힌 이야기라네. 노동은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거야. 노동에서 벗어나는 걸 쉰다고 하지. 내 일이 나한테는 노는 거였어. 나는 워커홀릭이 아니라 재미에 빠진 인간이었다니까. 허허.” -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이어령 > 중에서
워커홀릭이라 오해받을 만큼 자신의 일의 재미에 빠졌었던 이어령 교수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 귀감이 될만한 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용서할 사람이 아니라 용서받을 사람이라고 말하며 은혜에 찬 눈빛을 보였다는 이어령교수의 한권의 가르침은 스승이 필요한 사람에게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싶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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